2025년 기준 일본은 전체 인구의 약 30%가 65세 이상인 세계 최고령 국가입니다. 의료비 급증, 사회적 고립, 돌봄 인력 부족이라는 복합적 위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가운데,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실험하고 다듬어온 해법들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단순한 참고 사례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해법 중 하나가 파크골프입니다. 1983년 홋카이도 마쿠베쓰에서 탄생해 이제 500만 명 이상이 즐기는 국민 레저가 된 파크골프는, 신체 기능 유지·사회적 고립 예방·의료비 절감이라는 세 가지 효과를 동시에 거두는 예방적 공중보건 인프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이미 파크골프의 건강 효과, 사회적 예방 기능, 사회적 고립 완화, 의료비 절감 근거를 상세히 살펴봤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를 간략히 되짚은 뒤, 일본이 파크골프를 어떻게 커뮤니티 케어 시스템 안에 녹여냈는지, 그리고 한국은 이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집중합니다.
파크골프의 효과: 핵심만 짚는 리마인드
신체·정신 건강, 사회적 고립, 의료비 절감
PMC 등재 연구(2024)는 파크골프가 불안·우울 감소, 인지 기능 향상, 수면 개선 등 다층적 정신건강 효과를 제공함을 확인했습니다. 일본노년학평가연구(JAGES) 코호트 데이터(10만 명+)는 스포츠 그룹 참여가 기능적 장애 발생 예방과 낙상 감소에 직결됨을 입증했으며, 3년 종단 연구(2024)는 그룹 활동 형태 자체가 혼자 운동할 때보다 노쇠 지표 개선에 더 효과적임을 밝혔습니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PLOS ONE 3년 종단 연구(2019)는 스포츠 그룹 참여가 사회적 고립 발생을 유의미하게 줄인다는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예방 효과가 의료비 절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본 미쓰기(三次)시 사례가 국제학술지(IJIC, 2017)를 통해 실증했습니다. 지역사회 통합 케어 시스템 도입 이후 미쓰기의 와상 노인 비율과 노인 의료비가 전국 평균과 반대로 감소 추세를 보였고, 이 모델은 이후 일본 정부의 전국 정책 기반이 됐습니다.
일본 커뮤니티 케어 모델: 파크골프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지역포괄케어 시스템의 4층 구조
일본의 지역포괄케어 시스템(地域包括ケアシステム)은 2006년 장기요양보험법 개정과 함께 점진적으로 도입됐고, 2015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국화됐습니다. 이 시스템은 ‘자조(自助, Ji-jo)’, ‘호조(互助, Go-jo)’, ‘공조(共助, Kyo-jo)’, ‘공적 케어(公助, Ko-jo)’의 4층 구조로 작동합니다. 즉, 개인의 자기 건강 관리를 기반으로, 이웃·친구·지역사회의 자발적 상호 지원이 그 위에 쌓이고, 그 위에 사회보험 체계가, 그 위에 공적 복지 서비스가 얹히는 구조입니다.
파크골프는 이 구조에서 1층(자조)과 2층(호조)을 동시에 담당합니다. 개인이 스스로 매일 걸어서 운동하는 자조 행위이면서, 클럽과 토너먼트를 통해 이웃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호조 활동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파크골프를 단순한 레저가 아닌 커뮤니티 케어 인프라로 보는 핵심 이유입니다.
미쓰기 모델에서 나가야마 모델까지: 지역 주도 실험의 역사
일본 커뮤니티 케어의 원형은 1970년대 히로시마현 미쓰기(三次)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의사·행정·복지 담당자가 손을 잡고 의료·요양·예방을 한 지붕 아래 묶었고, 그 결과 와상 노인 비율과 의료비가 전국 추세와 역행하며 감소했습니다. 이 실험은 2006년 이후 전국 제도화의 모델이 됐습니다(IJIC, 2017).
이후 2022년 ScienceDirect에 발표된 나가야마(永山) 모델 연구는 고령화된 뉴타운 주거 단지에서 주민 주도 커뮤니티 케어가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핵심은 ‘복합 지원망’입니다. 전문 케어 서비스가 토대를 만들고, 자원봉사·스포츠·문화 활동이 그 위에서 일상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합니다. 파크골프 클럽이 바로 이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고 연구는 지적합니다.
공간 전략: 유휴 인프라를 건강 자산으로
세계은행은 2024년 보고서에서 일본 고령화 대응 도시 전략의 핵심이 ‘새로운 인프라를 짓는 것’이 아니라 ‘기존 인프라를 재목적화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폐교를 복합 돌봄 시설로 전환하고, 하천변 유휴지를 건강 활동 공간으로 바꾸는 방식입니다. 파크골프장은 이 전략의 대표 사례입니다. 일반 골프 코스의 10분의 1 면적으로 조성할 수 있어, 도심 공원 한 구석이나 하천 부지에도 설치할 수 있습니다.
2025년 발표된 도쿄대학의 대학-지역사회 연계 CBPR 연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파크골프장 같은 공간이 전문 의료인과 시민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하는 ‘낮은 문턱의 건강 거점’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파크골프 클럽 모임에 보건 담당자가 함께하거나, 간단한 건강 체크 서비스를 연계하는 방식입니다.
서울 파크골프 대축제 사례: 복지와 스포츠의 결합 실험
2025년 서울에서 열린 파크골프 대축제 현장에는 서울시 복지 정책 부스가 함께 운영됐습니다. ‘안심돌봄 120’, ‘외로움 없는 서울’, ‘병원안심동행서비스’ 등 고령자 복지 서비스를 파크골프 이용자들에게 직접 안내한 것입니다. 파크골프장이 복지 정보 접점이자 사회적 고립 예방의 커뮤니티 거점으로 활용된 사례입니다. 이는 일본의 4층 구조 중 2층(호조)과 3층(공조)을 연결하는 실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용: 가능성과 과제
한국의 현황: 폭발적 성장, 그러나 정책 연계는 미흡
한국 파크골프의 성장 속도는 인상적입니다. 2020년 전국 254개소이던 파크골프장이 2025년 상반기 기준 423개소로 늘었고, 대한파크골프협회 등록 회원은 같은 기간 4만 5,000명에서 20만 명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4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비등록 인구를 포함하면 이미 5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2024년 8월 기준 전국 파크골프장 조성에 5,395억 원이 투입됐으며, 이 중 92%가 지방비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파크골프 확장은 대부분 ‘체육 인프라’ 논리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본처럼 지역포괄케어 시스템과 연계하거나, 보건·복지·체육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설계는 아직 초기 단계입니다. 오히려 세대 간 공간 갈등, 환경훼손 논란, 도농 간 불균형 등의 문제가 불거지며 단순한 수요 대응식 확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 커뮤니티 케어 정책과의 연계 가능성
한국 정부는 2018년 11월 ‘지역사회 통합돌봄 기본계획(1단계: 노인 커뮤니티케어)’을 발표하고, 주거·건강·요양·돌봄 서비스를 연계해 어르신이 살던 곳에서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한국형 커뮤니티케어 모형을 개발해왔습니다. 2019년부터 16개 시군구 선도사업을 거쳐 현재 전국 확대를 추진 중이며, 법적 기반인 ‘지역사회 통합돌봄 기본법’ 제정도 진행 중입니다.
이 흐름과 파크골프 인프라를 연결하는 것이 핵심 과제입니다.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읍면동 통합돌봄창구와 파크골프 클럽을 연계해 고령자 안부 확인·건강 모니터링 역할을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방식이 가능합니다. 클럽 운영자나 동호회 임원이 ‘지역사회 자원봉사 케어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하고, 장기 결석자에 대한 안부 확인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구체적인 예입니다.
4단계 적용 모델: 일본 경험을 한국식으로 적용하기
일본의 성공 사례를 단순 이식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한국의 행정 구조, 장기요양보험 체계, 지역 특성에 맞는 한국형 모델이 필요합니다. 다음 4단계 접근이 현실적입니다.
1단계는 접근성 기반 구축입니다. 도보 15분 내 거리에 파크골프장이 있어야 커뮤니티 케어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현재 수도권 및 대도시 집중 현상을 해소하고,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 지역 우선 배치 전략이 필요합니다. 요금 체계도 노인 복지시설 이용료 수준으로 낮추거나, 장기요양보험 예방 급여와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2단계는 클럽 문화의 사회적 설계입니다. 단순한 동호회가 아니라, 정기 출석 확인·소규모 건강 점검·고립 위험자 발굴 기능을 내재화한 클럽 운영 모델이 필요합니다. 일본의 노인 복지센터(老人福祉センター)가 게이트볼·파크골프 클럽과 연계해 사회적 참여를 촉진하는 방식을 벤치마킹할 수 있습니다.
3단계는 보건소·복지관과의 연계입니다. 파크골프장을 단순 체육 시설이 아닌 ‘예방적 건강 거점’으로 재정의하고, 지역 보건소의 방문 건강관리 사업, 치매안심센터, 노인맞춤돌봄서비스와 연계하는 운영 모델을 설계해야 합니다. 분기 1회 보건소 스태프의 현장 방문, 치매 조기 선별 프로그램 연계 등이 실질적 방안입니다.
4단계는 데이터 기반 성과 관리입니다. 일본 JAGES 프로젝트처럼 파크골프 참여와 의료비·요양 서비스 이용률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코호트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 데이터가 축적될 때 비로소 파크골프 인프라 투자를 ‘복지 예산’으로 정당화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정책 지원 근거가 만들어집니다.
극복해야 할 과제
한국의 파크골프 확장이 진정한 커뮤니티 케어 인프라가 되려면 몇 가지 구조적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첫째, 부처 칸막이 문제입니다. 파크골프장은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또는 지자체 체육 부서 소관이고, 커뮤니티 케어는 보건복지부 소관입니다. 이 두 부처가 협업하는 통합 설계 없이는 일본식 연계 모델을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세대 갈등 관리입니다. 전북 익산, 충북 청주 등에서 이미 유휴 농지 활용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파크골프장이 특정 세대의 전용 공간이 아니라 다세대 커뮤니티 허브로 기능하려면, 청소년 프로그램 연계, 가족 단위 이용 활성화, 지역 주민 의견을 반영한 입지 선정 절차가 필요합니다.
셋째, 장기 관점의 투자입니다. 한국 커뮤니티케어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이 정책은 20~30년의 중장기적 비전을 갖고 추진해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일본이 미쓰기 모델을 시작한 1970년대부터 전국 제도화까지 40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정책 환경에서는 이 모델이 작동하기 어렵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결론: 정책의 언어로 공원을 재설계하기
파크골프장은 잔디밭 위의 레저 시설이 아닙니다. 제대로 설계되면, 그것은 자조와 호조가 만나는 공간이고, 예방이 치료를 대체하는 거점이며, 고립이 연결로 바뀌는 일상의 장치입니다.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지역포괄케어 시스템은 이 공간들을 통해 작동합니다.
한국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파크골프 인프라를 단순히 ‘노인들의 여가 시설’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역사회 통합돌봄 시스템의 예방적 1·2층으로 설계할 것인가. 후자를 선택한다면, 지금 조성되고 있는 423개소의 파크골프장은 5,395억 원짜리 체육 인프라가 아니라, 미래 요양 비용을 줄이는 예방 투자가 됩니다. 일본의 경험은 그 선택이 옳다는 것을 40년치 데이터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